2009년 09월 09일
2pm 논란에 관한 단상들
| 1. 토론. 토론을 할 수 있는 경우나 주제가 있는 반면에 할 수 없는 주제 또한 존재합니다. 이 사건은 토론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 같군요. 모두들 처음 가지고 있던 의견을 바꾸지 않으니까요. 결국 다른 사람의 의견을 확인하는 걸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런 논쟁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것은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판단이 1차적이기 때문이라고 보이는군요. 이 때 논리란 이 1차적으로 주어진 감성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2차적으로 도입되는 매커니즘에 다름 아니죠. 때문에 이러한 2차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결국 무의미한 결말을 낳기 십상입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관찰자적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논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자기 의견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만 논리를 살펴본 후에 판단을 내리고 그에 맞는 감정을 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죠. 물론 한 사람이 항상 같은 방식을 보인다고 보긴 어렵고, 특정한 사건이 자신한테 어떤 의미를 지녔느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겠군요. 2. 냄비근성. 이 단어를 '한국인의 민족적 성격'으로 해석하곤 하는데에는 이견이 있습니다. 오히려 전 냄비근성은 인터넷 자체가 만들어낸 특성처럼 보이거든요. 인터넷 게시판은 의견이 집중되는 공간입니다. 오프라인으로 따지자면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과 진배 없죠.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무언가가 논쟁거리가 된다면 꽤나 볼만하겠지요. 그런 공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슈를 만들어내고, 그 이슈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결국 그 공간 자체가 응집된 공기로 가득 차게 되겠죠. 그게 토론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결국 남는 것은 무수한 의견 개진으로 인한 감정의 응집과 폭발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요. 이번 사태는 인터넷이 만들었고, 또 인터넷이 키웠죠. 때문에 냄비 근성이란 인터넷 자체에 내재한 특성에 가깝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 한국의 인터넷은 뭐랄까 밀도가 높다고 해야 하려나요. 미들 포털이라고 불릴만한, 이슈와 정보가 모여들고 재생산되는 특정한 공간들이 많죠. 이곳도 그 중 하나구요. 이글루스만 들려도 사회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와 그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한 집중력에 더해 덧글 등으로 대표되는 개방성이 합해진 결과가 냄비근성의 기원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3. 파시즘. 이 단어가 등장한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왜냐면 누구도 이 개념을 면밀하게 정의하고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글 속에 투척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개념을 선언하듯 사용하는 경향이 있죠. 모두들 이 단어를 정확히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혹은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여기 적용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반면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이게 뭐가 파시즘이냐'는 식 이상의 반박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지식인(혹은 그런 척 하는 사람들)적 태도에 대한 강한 부정적 반응입니다. 디워 때의 진중권을 대하는 태도와 유사하죠. 둘째, 파시즘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입니다. 파시즘의 '정확한 의미'를 논쟁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단어를 들으면 자신의 행동이 잘못인 게 확실한 것 같고, 그래서 그 단어를 쓰는 것 자체만으로로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제스쳐가 되기 때문이죠. 한 마디로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 단어는 좋은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든 이 문제는 '토론이 불가능한' 주제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으로 합의를 찾는 토론의 이상은 여기서는 무화됩니다. 때문에 공격의 방향성 자체를 감성의 영역으로 틀어주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겠죠. 즉 '파시즘'은 공격을 뒷받침해 주는 논리적 명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감성적 차원을 공격하는, 즉 1차적 수준에서 공격하는 개념의 폭격기에 가깝습니다. 무기는 파시즘의 내용이 아닌 그 단어가 풍기는 부정적 뉘앙스가 됩니다.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선언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 같군요(이 방식에 대한 저의 입장은 나름대로 긍정적입니다. 나름대로의 폭력성을 포함하고 있는 전략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보다 생산적인 건 정말로 파시즘이 어떤 개념인지를 꼼꼼하게 따지는 작업이겠죠.(여기에 덧붙여진 애국이라는 감정은 이 현상을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게 만들죠) 그렇게 한다면 파시즘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지금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통찰력을 던져주는 개념이나 해석을 발굴해낼 수는 있을 겁니다.. 제 능력으로는 무리지만요. 4. 권리. 이 사건을 둘러싼 주장들 중 대중들의 '권리'에 관한 의견들도 있더군요. '권리'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근대의 혹은 민주주의의 발명품이죠.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었을까요?(음 현재형으로 써야 하려나요) 글쎄요, 전 이 경우에는 '계약'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돈을 통한 계약관계에 얽혀있죠. 그 계약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우리는 TV수신료를 통해 계약을 체결하지만, 방송사는 광고의 존재 때문에 그 계약을 받아들이죠. 3각 트라이앵글 계약 관계라고나 할까요. 계약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걸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계약에 그를 단죄할 권리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적혀있지 않다는 건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적혀있지 않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건 너무 협소한 권리의 정의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명시되지 않은 권리들이 우리를 신으로 착각하게 만들 가능성을 경계할 필요는 있어요. 전 이 사태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권리가 우리를 신으로 만들어 버린 거에요('공인'이라는 말은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죠). 그게 바로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도덕성을 훨씬 상회하는 정의를 대표하며 그를 비난하게 된 이유로 보입니다. 우리는 신이니까요. 하지만 전 그래선 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고, 우리에게 그럴 권리는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저에겐 이 글이 그 사건에 대한 첫 번째 발언입니다만... 어쨌든 전 죄책감을 느낍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가진 권리마저 내팽개쳐 버렸는데도, 있지도 않은 권리를 통해 타인을 단죄하는 걸까요. |
# by | 2009/09/09 15:25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