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m 논란에 관한 단상들

1. 토론. 토론을 할 수 있는 경우나 주제가 있는 반면에 할 수 없는 주제 또한 존재합니다. 이 사건은 토론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 같군요. 모두들 처음 가지고 있던 의견을 바꾸지 않으니까요. 결국 다른 사람의 의견을 확인하는 걸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런 논쟁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것은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판단이 1차적이기 때문이라고 보이는군요. 이 때 논리란 이 1차적으로 주어진 감성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2차적으로 도입되는 매커니즘에 다름 아니죠. 때문에 이러한 2차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결국 무의미한 결말을 낳기 십상입니다.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관찰자적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논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자기 의견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만 논리를 살펴본 후에 판단을 내리고 그에 맞는 감정을 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죠. 물론 한 사람이 항상 같은 방식을 보인다고 보긴 어렵고, 특정한 사건이 자신한테 어떤 의미를 지녔느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겠군요.

2. 냄비근성. 이 단어를 '한국인의 민족적 성격'으로 해석하곤 하는데에는 이견이 있습니다. 오히려 전 냄비근성은 인터넷 자체가 만들어낸 특성처럼 보이거든요. 인터넷 게시판은 의견이 집중되는 공간입니다. 오프라인으로 따지자면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과 진배 없죠.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무언가가 논쟁거리가 된다면 꽤나 볼만하겠지요. 그런 공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슈를 만들어내고, 그 이슈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결국 그 공간 자체가 응집된 공기로 가득 차게 되겠죠. 그게 토론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결국 남는 것은 무수한 의견 개진으로 인한 감정의 응집과 폭발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요. 이번 사태는 인터넷이 만들었고, 또 인터넷이 키웠죠. 때문에 냄비 근성이란 인터넷 자체에 내재한 특성에 가깝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 한국의 인터넷은 뭐랄까 밀도가 높다고 해야 하려나요. 미들 포털이라고 불릴만한, 이슈와 정보가 모여들고 재생산되는 특정한 공간들이 많죠. 이곳도 그 중 하나구요. 이글루스만 들려도 사회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와 그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한 집중력에 더해 덧글 등으로 대표되는 개방성이 합해진 결과가 냄비근성의 기원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3. 파시즘. 이 단어가 등장한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왜냐면 누구도 이 개념을 면밀하게 정의하고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글 속에 투척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개념을 선언하듯 사용하는 경향이 있죠. 모두들 이 단어를 정확히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혹은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여기 적용하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처럼. 반면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 단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이게 뭐가 파시즘이냐'는 식 이상의 반박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지식인(혹은 그런 척 하는 사람들)적 태도에 대한 강한 부정적 반응입니다. 디워 때의 진중권을 대하는 태도와 유사하죠. 둘째, 파시즘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부정적 반응입니다. 파시즘의 '정확한 의미'를 논쟁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단어를 들으면 자신의 행동이 잘못인 게 확실한 것 같고, 그래서 그 단어를 쓰는 것 자체만으로로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제스쳐가 되기 때문이죠. 한 마디로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 단어는 좋은 전략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든 이 문제는 '토론이 불가능한' 주제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설득으로 합의를 찾는 토론의 이상은 여기서는 무화됩니다. 때문에 공격의 방향성 자체를 감성의 영역으로 틀어주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겠죠. 즉 '파시즘'은 공격을 뒷받침해 주는 논리적 명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감성적 차원을 공격하는, 즉 1차적 수준에서 공격하는 개념의 폭격기에 가깝습니다. 무기는 파시즘의 내용이 아닌 그 단어가 풍기는 부정적 뉘앙스가 됩니다.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선언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 같군요(이 방식에 대한 저의 입장은 나름대로 긍정적입니다. 나름대로의 폭력성을 포함하고 있는 전략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보다 생산적인 건 정말로 파시즘이 어떤 개념인지를 꼼꼼하게 따지는 작업이겠죠.(여기에 덧붙여진 애국이라는 감정은 이 현상을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게 만들죠) 그렇게 한다면 파시즘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지금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통찰력을 던져주는 개념이나 해석을 발굴해낼 수는 있을 겁니다.. 제 능력으로는 무리지만요.

4. 권리. 이 사건을 둘러싼 주장들 중 대중들의 '권리'에 관한 의견들도 있더군요. '권리'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로운 개념입니다. 근대의 혹은 민주주의의 발명품이죠.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었을까요?(음 현재형으로 써야 하려나요) 글쎄요, 전 이 경우에는 '계약'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돈을 통한 계약관계에 얽혀있죠. 그 계약은 상당히 복잡합니다. 우리는 TV수신료를 통해 계약을 체결하지만, 방송사는 광고의 존재 때문에 그 계약을 받아들이죠. 3각 트라이앵글 계약 관계라고나 할까요. 계약은 주어져 있고, 우리는 그걸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계약에 그를 단죄할 권리는 적혀있지 않습니다. 적혀있지 않다는 건 은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적혀있지 않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건 너무 협소한 권리의 정의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명시되지 않은 권리들이 우리를 신으로 착각하게 만들 가능성을 경계할 필요는 있어요. 전 이 사태에서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권리가 우리를 신으로 만들어 버린 거에요('공인'이라는 말은 이를 정당화하는 수단일 뿐이죠). 그게 바로 우리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도덕성을 훨씬 상회하는 정의를 대표하며 그를 비난하게 된 이유로 보입니다. 우리는 신이니까요.

하지만 전 그래선 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고, 우리에게 그럴 권리는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저에겐 이 글이 그 사건에 대한 첫 번째 발언입니다만... 어쨌든 전 죄책감을 느낍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가진 권리마저 내팽개쳐 버렸는데도, 있지도 않은 권리를 통해 타인을 단죄하는 걸까요.

by ontology | 2009/09/09 15:25 | 트랙백 | 덧글(0)

당신을 철학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당신을 ○○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저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당신을 철학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철학책은 절대 읽을 필요 없습니다. 메뉴얼만 숙지하시면 됩니다.

일단 철학 전문가가 되기 위해 추앙해야 할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고전 철학 중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꼽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꼽는 것은 다른 철학 스노브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메뉴얼은 에픽테토스입니다.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몰라도 괜찮습니다. 글 한 줄 읽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근대 철학자들 중에서는 데카르트보다는 흄을, 칸트나 헤겔보다는 피히테와 셸링을 추앙해야 합니다. 이도저도 다 싫으면 라이프니츠 정도 추천드립니다. 

20세기 초반 철학자들 중에는 하이데거를 타켓으로 잡고 나치를 지지한 철학자라고 까대면서 후설을 추앙하십시오. 베르그손은 조금 애매한 위치로군요. 화이트헤드 추천합니다. 작품을 읽기도 힘들지만 못 봤어도 상관 없습니다. 화이트헤드를 추앙하십시오.

20세기 중반은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은 안됩니다. 가스통 바슐라르 강추. 과학철학 쪽에서는 토머스 쿤이나 칼 포퍼보다는 파이어아벤트를 추앙하시고, 실존주의는 무시하시되 키에르케고르만이 진짜라며 마지못해 인정하는 제스쳐를 취해 주십시오. 비판이론 학자들 중에서는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보다는 악셀 호네트라는 이름을 외워 두시면 좋습니다.

최근 철학자들 중에서도 들뢰즈, 푸코, 데리다, 지젝 이런 철학자들 꼽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잘 몰라도, 곧 죽어도 조르지오 아감벤, 미셸 세르, 알랭 바디우 이 정도가 좋습니다. 그 중에서 알랭 바디우가 가장 좋습니다. '사건'이라는 단어만 알면 됩니다. 걍 댓글마다 바디우 덜덜덜 하시면 됩니다. 굳이 들뢰즈를 꼽아야 겠다면 <차이와 반복>만이 읽을만 한 수준이라고 말하고 끝내시면 됩니다.

대충 이정도 입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체 읽고 철학에 관심 생겼다고 절대 고백하지 마십시오. 캐무시 당합니다.  

by ontology | 2009/06/09 22:05 | 트랙백 | 핑백(2) | 덧글(2)

이것저것

1. 쓰기.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문제다. 글을 시작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적기, 쓰기, 문장을 만들기, 문단을 나누기, 관념을 구체화하기, 사유를 발생시키기. 어쩔 수 없이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죄책감이 든다. 내가 쓴 글은 정말 조금이나마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그저 또 하나의 배설물에 지나지 않을 뿐인가. 디지털 영화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너무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 번 소모하면 끝인 필름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작동시키기 전 화면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완벽한 시뮬레이션이 미리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디지털 영화는 그렇지 않다. 언제든 찍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고,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다. 장면을 촬영한다는 것이 너무 쉬워졌다. 이는 고민의 부재를 함축한다. 마찬가지의 문제, 혹은 위험이 글쓰기에도 도사리고 있다. 키보드로 쓴 글은 너무 쉽게 지울 수 있다. 백 스페이스만 누르면 되는 글쓰기는 볼펜으로 쓰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 번 쓰면 지울 수 없기에 한 문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치열함 또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내가 '예전의 고리타분한 방식'만을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글쓰기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최소한 하나의 글에는 그 글이 소모하는 잉크나 바이트에 값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무것도 타이핑하지 않고 있다. 글쓰기는 사유를 촉발해야 하고, 그 사유를 촉발하기 위해서는 어떤 외적 충격이나 내적 고통 혹은 치열함, 이 둘 중 하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글은 이미 죽은 글이다. 그 글에는 행위의 차원이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혹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엇인가를 내놓는 행위이다. 죽은 글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행위는 자기의 존재를 거는 것으로 정의되고, 글쓰기란 그런 의미에서 이미 행위이며 실천이다. 이론과 실천을 구분하는 통념과는 반대로 이론 그 자체가 이미 실천의 한 부분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쓸 수 있다면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가능하다.

2. 읽기. 요즘은 책을 통 못 읽고 있다. 예전에는 '한국인의 한 달 평균 독서량 1~2권' 이런 기사 보면 비웃었는데, 요즘은 이해가 간다. 할 일이 너무 많다. 틈틈이 짬을 내서 독서를 해야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기는 힘들다. 그런 식으로 '헤겔 또는 스피노자' 같은 책을 읽으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릴 것이다. 그래서 독서목록에는 어쩔 수 없이 소설만을 채워 넣어야 한다. 지금은 캐치-22를 손에 들었는데,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되었다고 해서.... 구판 번역으로 읽는다. 온 종일 수학에만 둘러싸여 있으면 머리가 아프다. 재미있는 소설이다. 구체적인 상황이 주어진 '고도를 기다리며'라고 해야 되려나. 어쨌든 '하드SF 르네상스'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걸로 버티자.

3. 말하기. 이건 뭐, 다른 사람하고 말하다가 나도 모르게 흥분하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지만 흥분하면 자제가 잘 안 되는 편이라서 말싸움의 끝까지 치닫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런 경우엔 그 사람과는 영영 화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곤 했다. 그렇다고 물리적 충돌에 이른 적은 없지만, 말다툼도 극한까지 가면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한 번 끝난 사이라고 생각되면 미련없이 연락을 끊어 버리는 성격이라 사이가 안 좋아진 사람과 다시 화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게까지 싸운 사람은 한 손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더라도 별로 성숙한 태도는 아니다. 나이가 든다고 성숙해진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영영 극복할 수 없다. 그건 거의 자명한 사실이다.


by ontology | 2008/09/27 23:08 | 트랙백(1) | 덧글(0)

이것저것

1. 하루에 한 편 이상씩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컴퓨터만 켜면 딴 짓 하느라고 바쁘다. 오늘도 공친 셈이다.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다. 6월 10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의 대만영화제를 보러 가야 되고 또 시위에도 참석해야 되고. 나름대로 대만영화제에 많은 기대를 했다. 스케줄을 보니 실망이 컸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꽤 많이 빠졌다. 허우 샤오시엔의 '남국재견'은 꼭 보고 싶었는데, 다운 받아놓은 걸 봐야 하나...다운 받아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범죄처럼 느껴진다(느껴진다가 아니라 범죄 맞다). 하지만 그러한 죄책감 보다는 허우의 영화,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다. '하나 그리고 둘'을 100인치 스크린으로 보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카페 뤼미에르를 극장에서 봤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했던가. 그러고보니 2005년에 했던 1회 영화제는 좀 더 풍성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님 말고.

2. 이번 촛불 정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잡지 같은 곳이나 잘 알려진 지식인들의 분석보다 일반 네티즌들이 훨씬 더 진중하고 통찰력있는 글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한겨례21에 실린 글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봤지만, 이글루스나 티스토리에 있는 블로거들의 텍스트를 보고 감탄한 적은 한 두 번이 아니다. 특히 2071님의 글과 한윤형님의 글이 인상적이다. 나는 이렇게 깊숙히 들어와 있는 일에,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어떤 식으로 판단을 해야 할까 당황스러운데 저렇게 명확히 초점을 짚어주면 정말 놀랍다. 저런게 내공이라는 건가 하고 생각하게 되고.

3.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황량하다. 작은 소도시. 조용하고 약간은 명랑한 분위기.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 집에서, 도서관으로, 영화관으로, 다른 도서관으로, 다시 집으로. 이 도시에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초등학교가 어디 있는지, 중학교가 어디 있는지, 동사무소가 어디 있는지, 경찰서가 어디 있는지. 소방서가 어디 있는지. 시내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나는 모른다. 알려 준 사람이 없다. 내가 살아온 곳이 아닌, 내가 알아온 놈도 없는, 내가 익숙한 길도 아닌, 바라보면 황량한 이곳에, 붙어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 것인가. 서울이 그립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향수를 느낀다. 이상한 일이다. 첫 번째로 겪는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판타지 소설을 읽어왔던 나는, 나중에는 중세 신화가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다. 내 뿌리처럼 느껴졌다. 영화 '반지의 제왕'이 아직도 베스트10 안에 들어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터이다. 아마도.

4. 군대는 나의 사유를 앗아갔다. 2년 넘게 어떻게 살아남을까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만 골몰하다 보니 솔직히 적응이 잘 안되는 면도 있다. 그렇다고 거기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거나 그런건 아니고... 예전 모드로 돌아가는 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 뿐이다. 빨리 회복되어야 할텐데. 혹시 영원히 상실하지는 않았을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무언가를. 글쓰는 스타일도 변한 느낌이 든다. 물론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쉽게 쓰려고 하고는 있지만, 불안한 무언가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5. 타인과의 관계가 많으면 감당하기 어렵고, 없으면 벅차다. 두 추를 잘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할텐데, 지금의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1학년 때는 너무 관계에 눌려 살았고, 2학년 때는 뭐 나름대로 잘 견뎌낸 것 같았고. 군대 들어와서는 관계가 나를 압사시켰다. 그래서 무언가가 변한 느낌이고. 지금은 거의 텅 비었다. 無에 가까울 정도로. 그래서 약간 유리한 측면도 있는데, 현 상황을 이용해 일종의 사회적 자살, 기존의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내는 결단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유약하지 않을까. 그 전에 미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by ontology | 2008/06/08 23:34 | 근황 | 트랙백 | 덧글(0)

꿈, 욕망, 실재

꿈의 주인

나승원의 ‘꿈의 주인’은 꿈이라는 소재로 한 에피소드 형식의 짧은 만화이다. 단편의 매력인 ‘한방’이 인상적인 작품으로서, 지금까지 두 화가 진행됐는데 2화가 1화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하지만 두 이야기 모두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두 화 모두 꿈과 현실의 혼돈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준다. 1화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주인공은 꿈에서 한 친구를 만나지만 그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특이하게도 그는 주인공과 키나 웃음소리 등이 비슷한데, 이 만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 친구에게 “친구야 넌 내 꿈속 사람이야”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친구는 “친구야 네가 내 꿈 속 사람이야”라고 대답하며, 이 말이 끝난 직후 주인공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 두 화 전체에서 바로 이 갑작스러운 자각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만화의 핵심이다. 이러한 자각을 겪고 난 뒤 주인공은 자신의 현실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토대가 무너지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는 장자의 내가 나비를 만났는데 나비가 꿈인가 내가 꿈인가라는 통속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그 때 꿈 속에서 나비가 나에게 ‘네가 꿈이고 내가 현실이다’라고 말을 건다면? 이 만화가 표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느끼는 개인의 공포감이다.

1화는 주인공의 일상적인 삶(버스 카드를 충전 안해서 걸어서 학교까지 왔다갔다 한다든지)와 이런 꿈 이야기가 일종의 교차편집 식으로 이루어지며 둘 사이의 연결은 핵심적이지 못하다. 현실의 부분과 꿈 부분이 밀착되지 않아서 극적 매력은 떨어진다. 그에 반해 2화는 일보 전진을 보여준다. 이 단편은 꿈을 둘러싼 세 가지 심리적 상태를 잘 묘사한다. 첫 째는 꿈은 욕망을 실현시키는 공간이라는 것. 둘 째는 꿈은 죄책감의 공간이라는 것. 셋 째는 꿈은 실재와의 마주침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만화에서는 꿈이 두 번 등장하는데 이 에피소드가 첫 번째의 것보다 뛰어난 이유는 꿈과 현실이 좀 더 잘 밀착돼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꿈은 한 여자와의 데이트인데, 나중에 이 여자는 회사 동료로서 주인공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꿈 안에서 주인공은 데이트 중 화장실이 가는데 그 와중에 꿈을 깨게 된다.

두 번째 꿈에서 주인공은 회식 중 화장실을 가서 소변을 보며 잠깐 꾸게 되는데, 여기서 주인공은 뇌사상태에 빠진 고모부를 면회간다. 그 곳에서 고모에게 회사 때문에 면회를 못 온다고 꾸중하게 되는데, 물론 이는 그 날에도 회식 때문에 면회를 못 간 자신에 대한 죄책감의 발흥이다. 여기서도 꿈이 깨는 것은 오줌 때문이다(두 번의 꿈 모두 화장실, 혹은 소변과 관련해서 꿈에서 나오게 된다). 여기서 어떤 심상의 대체가 이루어진다. 호스로 소변을 보는 고모부의 꿈 속 이미지를 상기하던 주인공은 갑자기 그 이미지가 자기 자신의 이미지, 뇌사 상태에 빠진 채 호스로 소변을 보는 자신의 모습으로 대체되는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상기 이후 자신이 ‘술이 확 깬다’고 말한다. 욕망에서 죄책감으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현실의 토대가 전적으로 허물어지는 경험. 꿈과 현실이 뒤집어질 때 자신이 머무는 직업, 사회적 관계 등의 모든 것들이 환영으로 변한다.

이 에피소드에서 꿈의 의미는 욕망의 실현에서 죄책감의 현시로, 그리고 다시 어마어마한 공포를 수반하는 꿈 자체와의 마주침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주인공 자신의 현실적인 고민과 관계에서 기반한다. 하지만 마지막의 공포는 그런 현실적 고려와는 상관없는 순수한 것인데, 이는 꿈 자체, 욕망의 발현 같은 프로이트적 해설이나 미래를 예언하는 점지적 해석, 혹은 죄책감 같은 감정의 들어옴 등의 사회적인 해석으로 번역되지 않는 꿈이라는 이상한 어떤 것이 현실 속으로 들어오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인간 자신의 여러 가지 현실적 고려에서 벗어나있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고 마술적인 경험이다. 마술적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다. 마술은 초자연적인 무엇 같은 사회적 의미 체계 안에 들어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전혀 공포스럽지 않다. 반면 이 경험은 오히려 이전의 의미 체계들(직장인으로서의, 가족으로서의, 한국인으로서의 등등)이 무너지는 끔찍한 경험이다. 그것은 의미 이전의 실재와의 만남이다.

꿈의 주인’ 가장 비슷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만화는 내가 본 것들 중에서는 강풀의 ‘타이밍’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만화의 목표는 다르다. 두 만화가 다 현실을 넘어서는 비현실적인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타이밍’은 초자연적인 인물들에게 그 비현실성을 귀속시켜 놓고, 그들에 의한 사건의 발생과 해결이라는 서사적인 측면에 더 중점을 둔다. 여기서 비현실성은 저승사자나 귀신같은 전설이나, 10초의 시간을 돌리는 능력자 같은 의미 관계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반면 ‘꿈의 주인’은 순수한 각성의 순간, 에피파니적인 그 지점을 보여주는 데에서 멈춘다. 딱 거기까지, 더 나아갈 곳은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곳이 서사가 중지되는 지점. 모든 서사가 무너지는 의미 전환의 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서사적인 쾌감을 주는 ‘타이밍’을 더 높이 치고 싶지만, ‘꿈의 주인’은 아직 2회까지 밖에 나오지 않았다. 좀 더 기대하는 즐거움을 누려도 될 듯하다.

by ontology | 2008/06/07 12:22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